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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한국 소설

카스테라 - 박민규

by YK Ahn 2018.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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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황경신 작가의 <생각이 나서>를 읽을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 책에서 보았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보았던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박민규 작가의 <카스테라> 소설의 한부분이 적혀 있는 것을 읽었는데, 서점에 가면 꼭 찾아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잠시 들어왔을 때 교보문고에서 찾아보았다. 이 책 외에도 살 책들이 몇 권있어 리스트를 쭉 보다가 책장에서 집어 보았다. 만약 책의 글귀를 이전에 읽어보지 않았더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 같은 표지였다. 책을 펴 첫 페이지를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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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1985년 5월 벨기에의 브뤼셀이다.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흥분한 영국 응원단이 이탈리아 응원석을 향해 돌진한다. 담장이 무너진다. 서른아홉 명이 깔려 죽는다. 이 남자는 그 속에 있었다.


 제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하늘나라였다. 어이가 없군. 당연히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열을 식힐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해. 난 그게 필요해. 그런 그에게 신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그럼 냉장고 같은 건 어떨까? 과연! 그는 무릎을 쳤다. 그거 보람찬 삶이겠는걸. 그런 이유로, 한 때 리버풀을 사랑했던 이 남자는 냉장고로 태어났다. 그리고 굴러 굴러 나의 소유가 되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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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여기까지 읽고 결정했다. '이 책은 사야겠다'. 부모님집으로 돌아와서,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서 읽고 있던 책을 마저 끝내고 <카스테라>를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으면서, 허탈해 하면서, 어이 없어 하면서, 안타까워 하면서 읽었던 책은 얼마만인지...  책의 내용도 좋지만, 글이 이렇게 신기하게 써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왔다. 글을 읽으면서 이런 문체는 따라해보고 싶다라는 충동도 강하게 밀려왔다.


 이 책에는 <카스테라> 외에도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아, 하세요 펠리컨>, <야쿠르트 아줌마>, <코리언 스텐더즈>, <대왕오지어의 기습>, <헤드락>, <갑을고시원 체류기> 등이 있는데, 제목들은 하나같이 발랄하고 재밌지만, 그 내용의 민낯들은 암울하다. 힘들었던 80~9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사회가 가졌던 상처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런 암울하거나 혹은 갑갑했던 사회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뇌 속의 여과없는 기억이라고 하는게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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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된 거예요? 기린의 무릎을 흔들던 나는, 결국 반응을 포기하고 이런저런 집안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할머니의 소식과 어머니의 회복, 그리고 나는 부동산 일을 배울 수도 있다. 선배가 자꾸 함께 일을 하자고 한다. 자리가, 자리가 있다고 한다. 경제도 차차 좋아질 거라고 한다. 무디슨가 어디서 우리의 신용등급이 또 한 계단 올라섰대요. 좋아졌어요. 그러니 돌아오세요. 이제 걱정 안하셔도 된다니깐요. 구름의 그림자가 또 빠르게 지나갔다. 아버지, 그럼 한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것만 얘기해줘요.


 무관심한, 그러나 잿빛의 눈동자가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기린은 자신의 앞발을 내 손 위에 포개더니, 천천히,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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