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학/철학

관용론(Treatise on Tolerance) - 볼테르(Voltaire)

by YK Ahn 2021. 6. 18.
반응형

유럽 계몽주의 철학자. 딱 이 세글자가 아마 볼테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일 것이다. 사실 볼테르의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 먹은 것은 영화 <Man from Earth>에서 나온 그에 대한 한문장의 인용문 때문이었다.
-----------------------------------------------------------------------------------------------------------------------------------
"Did you know Voltaire was the first to suggest that the universe was created by a gigantic explosion? And then Goethe was the first to suggest that spiral nebulae were swirling masses of stars. We now call them galaxies. It's kind of funny how often new concepts of science find their first tentative forms of expression in the arts."
-----------------------------------------------------------------------------------------------------------------------------------
하지만 실제로 볼테르가 이러한 말을 했는지는 역사적인 근거는 없고 영화 작가가 만들어낸 말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볼테르에 대한 호기심은 부모님 집 책장에 꽂혀있던 볼테르의 <관용론>을 펼치게 만들었다.

당연히 볼테르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관용론>이 왠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전개나 '관용'에 대한 정의(definition)같은 내용일 줄 알았다. 하지만 <관용론>은 당시 유럽에 전염병처럼 번져 있으며 계속 황폐화시키고 있던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에 대한 비판서이다. 종교의 광기에 사로잡힌 당시 프랑스에서, 개신교라는 이유로 사회 주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던 장남의 자살이 그의 아버지인 장 칼라스-그는 개신교이지만 명목상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의 살해로 변질되어 그에 따른 어처구니 없는 사형 판결과 집행,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파면과 추방 등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가톨릭, 개신교 및 여러 종파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전쟁, 학살 등이 만연하던 시대가 지나고 상황이 누그러져가던 시기에 다시 나타난 이 장 칼라스 사건을, 볼테르는 이러한 광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불관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서 어디에서도 다른 종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정당화 된 적이 없고, 인류 역사상 이런 종교적 불관용이 있었던 적이 없음에도, 이 불관용은 당시의 교회와 주교, 신부, 목사, 수도사 등 종교적인 불관용을 이용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선동질이다라는 것이다.
그도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언급되어 있어, "응? 갑자기 뭔 소리지?"라는 생각과 함께, 성서의 세밀한 부분에 대한 논의와 함께, 가끔 뜬금없이 나오는 '자연법'이라는 정말 막연한 개념이 재밌기도 하다.
책은 25장의 구성과, 가끔은 책의 본문보다 더 재밌기까지 한 그의 주석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렇게 다양한 chapter들에서도 줄곧 말하는 것은 '관용을 실행해야 한다'는 실천적 선언이다. 즉, 볼테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관용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며, 어떻게 진행되어가는가라는 등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관용이 왜 필요한가, 과거에는 관용이 어떠하였는가, 다른 사회에서는 어떠한가 등 관용의 실행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
복음서의 저자들이 요즘의 작가들 같았더라면 그들은 명분이 있었던 만큼 한층 더 서로를 헐뜯고 싸웠을 것이다. 성 마태는 다윗에서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세대가 28대라고 주장했다. 성 누가는 41대라고 보았다. 게다가 계보의 내용에서도 두 사람의 주장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명백한 대립에 대한 어떠한 논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이 대립은 여러 교부에 의해 해소되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늘 평화로웠다. 우리의 견해가 비록 다르더라도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또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겸손해야 한다는 점의 위의 사례보다 더 잘 보여주는 교훈이 어디 있겠는가?
-----------------------------------------------------------------------------------------------------------------------------------

사실 볼테르의 이 <관용론>을 읽고 나서 유럽의 계몽주의라는 것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듯 하다. 이전에는 도대체 계몽주의가 다른 철학자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싶었다.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관용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볼테르의 <관용론>은, 이성이 아닌 광기에 빠진 유럽을 구원하고자 하는 볼테르의 사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전인 것이다. 정말로 무지한 사회와 사람들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아래의 볼테르가 달아 놓은 주석이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하기야 우리는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실체'(substanc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실체'란, 글자 그대로, 밑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실체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밑에 있는 것이라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일은 이승에서는, 현생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깊은 칠흑 같은 암흑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서로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 이 암흑 속에서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다.
이렇게 진지한 성찰의 결론은 단 하나이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의견에 대해 반드시 관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들이 서로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할지 아닌지를 따져 보았다. 우리는 인간들이 어느 시대건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스 시대건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어야만 한다는 점도 입증된 것이다.
-----------------------------------------------------------------------------------------------------------------------------------

반응형

댓글